본문 바로가기

너랑 만날 바에야 결정사를 간다

너랑 만날 바에야 결정사를 간다(3)

'고모~~~~~~~'

 

지혜씨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 문을 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것 같은 조카가 가장 먼저 문 앞으로 와서 지혜씨를 반겨준다.

지혜씨는 힘이 들어 오늘은 힘껏 안아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허리를 숙여 볼이 닿게 꼬옥 안아준다.

지혜씨는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내가 낳지 않았기때문에 이렇게 귀엽기만 하겠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육아없는 아기는 책임없는 쾌락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고모, 고모라고 말하던 조카가 너무 귀여워서 주담대를 갚고 난 얼마 안되는 본인의 품위유지비를 쪼개서 조카의 선물을 사줬다.

그 어떤 남자에게도 이렇게 헌신적으로 소위 갖다 받친적이 없는데, 지혜씨는 조카 선물 살때는 가격표를 보지 않았다.

<돈 많고 결혼안한 고모/이모가 최고의 자산>이라는 유튜브 영상 제목을 보고 오빠 부부만 좋은일 시키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조카의 행복해하고 '고모 사랑해'라고 말할때는 모든 의심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어 왔니? 늦길래 자고오는줄 알았다'

 

 

지혜씨의 어머니가 식탁의 과일을 치우면서 쳐다보지도 않은채로 지혜씨를 맞이한다.

거실의 모습을 보니 친오빠가 소파에 누워있다. 티비를 켜둔채로 눈에는 초점없이 오른손에 리모컨을 들고 옆으로 누워있다.

여기저기 지친모습이 역력하다.

아마 새언니도 와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새언니도, 출가해 짐으로 가득해 창고로 쓰이는 오빠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겠지. 

 

 

지혜씨의 오빠 내외는 주말마다 아이를 맡기러 온다. 

둘다 칭얼대는 아기를 안고서 집에 왔을때가 생생하다.

처음에 둘이 왔을때만 해도 안쓰럽게 그지없었다. 

부부의 눈에는 에너지라고는 하나 없이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그들은 아이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아이를 넘기고서는 쓰러지듯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지혜씨의 오빠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분기에 한번 본가에 방문할까 말까 했지만은

지금에는 방문 횟수로만 따지면 효자도 이런 효자가 없다.

새언니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시댁에서 잠자는 것은 커녕 소파에 기대어 눕는것도 꺼려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눕고, 시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자마자 과일도 생략한채 잔다.

 

 

예전에는 본인의 집에서 평안한 자유시간을 빼앗는 오빠, 언니 그리고 조카, 저 세명의 무리가 싫었다.

'시댁이 무슨 탁아소라고 생각하나'했지만 일관되게 지쳐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길래'저런가 싶었다.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둘째를 생각한다는 오빠의 말을 듣고 지혜씨는 기겁했다.

'아니 한명 키우는 걸로도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왜 사서 고생하는 거야?'라는 물음에,

그녀의 오빠는 '아이를 보면 내가 다시 태어난거같아'라는 말로 대답했다.

아직 출산과 육아를 경험한 적 없는 지혜씨는 그 미스터리한 답변에 대해 여기저기 물음을 구했지만 어떻게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지혜씨는 이런 생각과 경험이 서로 꼬리를 물어 어느샌가 '결혼하게 된다면 아이를 가져야겠지..'라는 막연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동호랑은 이야기 해봤어?'

 

지혜씨의 어머니가 마치 비밀기지 위치를 묻는 모양새로, 주방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지혜씨에게 말을 건다.

그런 물음에 지난 비밀회의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는 독립군의 모양새로 머리위에 물음표를 띄운다.

 

'아니, 결혼말야. 할건지 말건지 말해야할때라고 엄마가 말했잖아'

 

지혜씨는 오늘 오전에 대구행 KTX를 타러 나가려는데 신발장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에 대해서 운이라도 띄워보라'는 뉘앙스로 말을 걸었고

하필이면 지혜씨의 구두가 그날따라 뒷꿈치에 걸쳐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안했어. 아니 그리고 결혼은 혼자해. 뭘 자꾸 서둘러'

 

'왜 안해! 결혼은 둘이 하니까 물어봐야할거 아냐!'

 

지혜씨는 논리 충만한 어머니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멈춘다.

지혜씨는 사실 말을 멈춘 이유가 본인도 지금 남자친구의 관계가 결정을 내릴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이렇게 지혜씨 스스로 마음이 답답하고 동호씨가 데이트 내내 보여준 낮은 템포가 유달리 신경쓰이는 것도 결혼때문임을 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는 결혼을 하던지 계속 사귀던지 둘다 아니면 헤어져야하는데 여러 이유로 결정을 미루고 있는걸 지혜씨 본인도 안다.

 

'아니, 아직 이직한지도 얼마 안되서 정신없고, 오빠도 개원 준비하느라 바쁘것 같고'

 

'에휴, 너 그러다 다 놓친다!'

 

지혜씨의 어머니는 더 무슨 말을 해봐야 소용있겠냐는 표정을 하고 싱크대로 자리를 옮긴다.

지혜씨는 그녀 방으로 옮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댄다.

 

(나는 이 남자와 결혼이 하고 싶은걸까)

 

지혜씨는 동호씨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벌써 집에 온지 1시간 가까이 되가지만 잘 돌아왔다는 문자에도 답이 없는 이 남자.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만난 시간이 있고 밖에 내놨을때 완벽하진 않아도 부끄럽지 않은 남자.

 

지혜씨는 생각을 바뀌 '지금 당장 이 남자가 결혼하자고 하면 나는 기쁠까'라고 뒤집어 생각해본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다고 결혼하자고 말하는 이 남자와 평생 같이 살 수 있을까

나를 엄청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전문직인 이 남자.

만약에 이 남자가 갑자기 소송에 휘말려 의사 면허가 없어져 외벌이가 되어도 좋을까.

갑자기 이렇게 생각하니 사랑없는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된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EBIT가 N인 지혜씨는 내친김에 상상의 나래를 이어가본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만약 동호씨랑 헤어지면 동호씨보다 더 좋은 조건의 다른 남자는 없을까?

그리고 놓친 남자중에 동호보다 더 나은 남자는 없었나.

 

(박지훈이 더 나은 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름 육각형의 형태를 가졌던 바로 직전 남친인 '그 놈'을 생각해본다.

 

지혜씨는 나즈막히 혼잣말을 한다.

 

 

 

'썅놈'